문헌록 전자족보(대동보) > 문헌록
           
1. 문헌 목록 〉16. 16世 〉14. <부정공>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소암공휘언신묘갈명
1. 문헌 목록 〉16. 16世 〉16. <부정공>사제병사공휘호신문장조재동궁시(賜祭兵使公諱虎臣文莊祖在東宮時)
1. 문헌 목록 > 16. 16世 >  
15.<부정공>통사랑선공감가감역도계공휘익신행장(通仕郎繕工監假監役道溪公諱翊臣行狀)
通仕郞繕工監假監役道溪公諱翊臣行狀 先生姓趙氏諱翊臣字仲輔淳昌之趙顯於麗代有諱元吉官門下侍中玉川府院君諡忠獻生諱瑜官典農副正以忠孝並全名於世鄕人建祠祀之六傳而有護軍公諱聖耈於先生爲曾祖祖諱爾鼎 贈承旨考諱泰興牧使 贈參判妣洪夫人縣監 贈左贊成柱天女寔淸陰金文正公尙憲外曾孫女也德性甚徽淑以崇禎紀元後六十五年 肅廟十八年壬申九月二十一日生先生于漢城府薰陶坊之第生而氣質粹美纔到步履巳莊重不妄動僅解言笑便簡黙不妄語在父母之側巳知孝敬與童隊相處絶不戱狎每逈不群端方嚴謹見者莫不歎異稱之天生學者第自齠年淸嬴善病牧使公公每憂之恆置膝下不加課督至于十歲猶未學先生一日忽慨然私請於洪夫人曰不讀書何以爲人嘗聞大人於吾伯兄敎之特早而於我獨愍其疾尙不令學此非所以愛之也牧使公聞而奇之乃授以小學一讀巳知其爲作聖模範讀未終卷乃曰人不行此道理不可爲人抄書中古人言行之最可法者粘諸壁上日夜觀玩必以力踐躬行爲期伯氏參判公從兄人司諫公於先生皆長十年而不敢以後生忽焉尋常敬畏而期待之甚重未幾先生患膓癰幾殆而甦雖沉淹之中不全抛學課乃以萬船補養皆虛僞只有操心是要規之句書揭璧間以自觀省焉趾齋閔忠文公鎭厚先生父友也來問疾見其不以病自處歎曰此子病雖深固無憂矣他日必大成就逮年十四益力學不懈杜門靜坐以一部小學尋繹而體認之一不間斷尤好石潭先生擊蒙要訣手抄而誦之聞我仲父農巖先生奄棄後學乃曰師門有沒身之恨遂以事農翁者事我先君子圃陰先生間又出入於寒水齋權先生之門令兩先生又後夢奠則先生益無考德之所矣遂閉門靜處求志益篤嘗以親命略就場屋而非雅意也未嘗爲擧子業但臨場口占以成淵識所發天然成章其對策中養氣治道等編人多艶誦以爲經世之文庚子牧使公捐館自侍湯至殯葬祭奠極致其誠哀毀盡禮 肅廟賓天時事多可虞預見辛壬士禍之作遂入春川築書室于昭陽江上四壁圖書罕出后外唯以存心硏經爲事移寓忠州之地又就丹陽中仙巖構精舍而捿息焉盖先生於早年嘗遊歷大小白諸勝地至中仙巖甚奇愛之有意卜築至是終遂其志丁巳拜繕工監假監役不應命甲子夏筳臣趙判書觀彬陳達先生學行請亟旌招以輔導東宮事未及行是年春寢疾取便調治黽勉入京第常老第死風埃爲恨而疾勢日益危㞃未克遂還山捿竟以五月十四日考終享年五十三士友聞之莫不齋咨流涕至有設位而哭其年八月十二日窆于交河大院里枕酉之原初配南陽洪氏士人喧女生一男宗溥爲伯氏後二女適生員李淵普郡守沈載鎭繼配廣州李氏生一女幼先生形容玉粹而氷潔稟賦外溫而內剛冲年志學積歲磨礱淸明在躬群妄自去能使庸夫俗子消鄙吝除忿懥請業於農翁雖在舞象之前聰穎夙詣操丈八至備聞道德之奧門路旣正功程不紊着力處在於大小學及心經近思錄諸書而遂以小學爲其本尤明於易學啓蒙太極圖及漁樵問答皇極經世書等編仙岩深僻處深致玩索之工彷佛乎百源之不爐不扇雅不喜誇張談玄故其深遠自得之妙人罕月窺測焉晩年又專意朱子全書浸沉濃郁不離案頭而常以箋註無成書爲欠探賾之餘就節畧一書編入退溪記疑尤齋箚疑農岩問目間又竊付巳意抄補辭旨之闕於理者以成一書名曰增補節畧通編註解又有大學補註一書眞讀朱子書者之指南也又曰聖謨賢訓昭如日星知之不難要在力行口耳之學都不濟事世子儒者多以問目長書馳騁論辨爲能事而先生則深厭此習惟以默識軆驗歛藏含蓄爲務故人或以物外捿逸之士目之鮮有識其學問脈路之眞造詣之深者焉素質虛嬴久崇沉痼聲若不出口體若不勝衣若高聲誦讀則未過數遍便覺昏憊故每低聲微讀未逾旬望輒必疾作而疾劇則曰吾病吾自知之齊心淵默十二日而自然神淸氣甦除非疾篤未嘗委臥其精力之固不爲憂疾所弛解如此也中年尤務含章絶不爲汗漫著述且不留稿只有散稿若干篇嘗曰五十以前只着工於窮理五十以後則始著述少償平日求道之心纔逾數年而沒未及遂其志雅性沖謙素無自號道溪名精舍故士友稱之以道溪處士焉嗚呼以用謙之滅裂淺識豈能窺測先生道德之萬一而以事契之重臭味之近猥托狀述以此歉恧累辭不獲黽勉撰次惟冀後世君子斟酌闡揚而巳 安東 金用謙 撰 蔭判書嘐嘐齋 통사랑선공감가감역도계공휘익신행장(通仕郎繕工監假監役道溪公諱翊臣行狀) 선생(先生)의 성은 조씨(趙氏)요, 휘는 익신(翊臣)이며 자는 중보(仲輔)이고 순창인인데 부정공 휘 유(瑜)의 후예이다. 고 휘 태흥(泰興)은 목사(牧使)로 증참판이요, 비는 홍부인(洪夫人) 현감 증 좌찬성 주천의 녀(縣監贈左贊成柱天之女)인데 곧 청음 김문정 공상헌(清陰金文正公尚憲)의 외 증손녀로 덕성이 심히 아름답고 맑았다. 숙종(肅宗:一六九二) 十八년 임신(壬申) 九월 二十一일에 한성 부훈도방 본제(漢城府薰陶坊之第)에서 선생이 탄생(嶽降)하였다. 어릴때부터 기질이 수미(粹美)하여 겨우 걸음마 때에 이미 씩씩하고 무거워 함부로 움직이지 아니하며, 겨우 말과 웃음을 해득(解得)할 때 문득 간중과묵(簡重寡黙)하여 허튼 말을 아니하고, 부모를 모실 때는 이미 효도로써 공경할 줄 알며, 아이들과 어울릴 때는 절대로 희압(戱狎)치 아니하고 단정 엄숙하니 보는 자가 기특하다고 감탄하고 하늘이 내리신 학자라 칭도하였다. 공은 七·八세 때 몸이 파리하고 병을 잘 앓으니, 목사공(牧使公)이 이를 근심하여 항상 슬하에 두고 공부를 감독하지 아니하였다. 十세에 이르도록 배우지 못하더니 선생이 하루는 문득 개탄하고 가만히 홍부인께 청하되 글을 읽지 않고 어찌 사람이 되겠습니까? 일찍 대인(父親)이 백형을 특별히 일찍 가르쳤다고 들었는데 나는 홀로 그 병을 측은히 여겨 지금까지 학업을 명하지 아니하니, 이는 실로 저를 사랑하는 바가 아니라 하였다. 목사공이 이를 듣고 기특히 여겨 소학(小學)을 주니, 한번 읽고 이미 성현(聖賢)이 되는 법을 알고 책을 다 읽기전에 이에 가로되 사람이 이 도리를 행치 아니하면 가히 사람이 될 수 없다 하고, 글 가운데 옛 사람의 말과 행실들에서 가장 가히 모범이 될 자를 뽑아 모든 벽상에 붙이고 밤낮으로 보고 강마(講磨)하여 반드시 실천궁행하니, 백씨 참판공과 종형 대사간공이 공보다 십년 년장이나 감히 후생(後生)이라 얕보지 않고 항상 애중히 여겼다. 미구에 선생이 장에 종기가 나서 위독하다가 희생하였는데, 그 중에도 학과를 온전히 쉬지 않고 이에 써 만반보양(萬般補養)이 다 허사요, 다만 절도있게 마음을 가짐이 요긴하다는 글을 써 벽에 걸고 스스로 보살피었다. 지재 민충문공진후(趾齋閔忠文公鎭厚)는 선생 부친의 벗으로써 찾아와 문병을 하였는데 그때 병으로써 자처하지 않는 공을 보고 탄식하되 이 애가 병이 비록 깊으나 진실로 근심이 없으니 훗날 반드시 성취 하리로다 하였다. 十四세에 이르러 더 독공하여 문을 닫아걸고, 조용히 앉아 소학 한권을 간단없이 찾아 주역하고 몸소 실천하며 더욱 석담선생 격몽요결(石潭即栗谷先生擊蒙要訣)을 좋아하여 등초하여 외우고 나의 중부 농암(仲父農巖)선생의 부음을 듣고 사문(師門)에 옷을 걷어 들지 못한 한이 있다 하였다. 마침내 농옹(農翁)선생을 섬길 성심으로 나의 선군자(先君子即先考) 포음(圃陰)선생을 섬기며, 또 한편 한수재 권선생(寒水齋權先生)의 문하에 출입하더니, 이에 두 선생이 또 전후하여 별세하니, 선생이 더욱 덕행을 증고할 데가 없게되었다. 그 후로는 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 뜻을 구함이 더욱 독실하였으니, 일찍 과장(科場)에 나간 것은 친명(親命)이요, 본의가 아니었었다. 일찍 정문(程文即科文)에 힘쓰지 아니하고, 다만 과장에 임하여 생각나는대로 써 놓으니 깊은 학식의 발현으로 천연성장(天然成章)한 것이요, 그 대책(對策)중 양기치도등편(養氣治道等編)은 사람이 많이 암송하여 이것을 세상을 다스릴 요결이라 하였다. 경자년에 목사공(牧使公)이 병환으로 별세하시니, 시탕(侍湯)으로부터 빈장제저(殯葬祭奠)에 이르기까지 극히 그 정성을 다하고 몸이 헐도록 슬퍼하며 예제를 다 하였다. 숙종이 빈천(昇遐)하매 국사가 간난(艱難)함으로 신임사화가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춘천에 들어가 소양강상(昭陽江上)에서 서실(書室)을 짓고 四벽에 도서(圖書)한 후에 가끔 호정에 출입하며, 오직 경전강마(經傳講磨)에 힘쓰고 충주(忠州)땅에 옮겨 살며 또 단양(丹陽) 중선암(中仙巖)에 나아가 정사를 얽어 서식하였다. 대개 선생이 소년때 일찍 대소백(大小白)산의 모든 승지를 두루 보고 중선암에 이르러 매우 특이하게 여기고, 그곳에다 복축(卜築)할 뜻을 두더니 마침내 그 뜻을 이루었다. 정사(丁巳)년에 조정에서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하였으나 명에 응치 아니하였고 갑자년 여름에 대신(大臣) 조판서관빈(趙判書觀彬)이 선생의 학행을 전달하고 빨리 불러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기를 주청(奏請)했었는데, 이 일이 실행되기 전 이해 봄에 공의 병환이 나 치료하다 괴로움을 무릅쓰고 경제(京第)에 들어가 항상 집에서 늙고 풍진속에 죽는 것을 한 하더니 병세가 날로 위독하므로 마침내 정사로 돌아가서 드디어 五월 十四일에 향년 五十三세로 별세하니, 사우간(士友聞)에 듣고 숙연 탄식하여 눈물 아니 흘린 자 없으며, 자리를 베풀고 곡한 사람이 많았었다. 그해 八월 十二일에 교하대원리침유지원(交河大院里枕酉之原)에 안장하였다. 초배(初配)는 남양홍씨 사인훤지녀(南陽洪氏士人暄之女)로 一남 종부(宗溥)는 백씨 후사로 보내고, 二녀는 생원 이연보(李淵普), 군수 심재진(沈載鎭)에게 출가하였다. 계배 광주이씨(廣州李氏)가 낳은 一녀는 어리다. 선생의 형용이 옥같이 정하고 얼음같이 깨끗하였으며, 성품과 외모는 따스하고 내심은 강장하여 어린 나이에 학문을 뜻을 두어 해를 거듭하여 갈고갈아 맑고 밝은 기운을 몸에 간직하여 모든 망상이 스스로 사라지게 하니, 능히 용렬한 지아비와 속된 남자로 하여금 더러운 것이 사라지고 분노가 꺼지게 할만 하였다. 농암옹(農巖翁)에게 학업을 청하였을 때 비록 무상(舞象)의 나이였지만 총명한 기운이 일찍 나아가고 자력으로 탐구하여 도덕의 오묘한 것을 갖추어 알아 학문의 길이 이미 바르고 공정이 어지럽지 아니하여 대소학(大小學) 및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의 서(書)에 힘을 기울렸으나 특히 소학으로써 기본을 삼고, 더욱 주역에 밝아 계몽(啓蒙)하였다. 태극도(太極圖) 및 어초문답(漁樵問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등 편을 선암(仙岩) 궁벽한 곳에서 깊이 강마하여 일백 근원이 영구히 꺼지지 아니한 것과 방불하며(彷佛乎百源之不爐不扇) 유아(儒雅)하여 과장치 아니하고 진리를 말하는 고로 그 심원 자득의 묘리(深遠自得之妙)를 사람이 측량할 수 없었다. 만년(晚年)에 또 주자전서(朱子全書)에 전심하여 짙은 향기에 젖어 책상을 떠나지 않고 항상 전주(箋註:하여 글을 이루지 못한 것을 결점으로 생각하여 그윽한 것을 탐색한 여가에 한편으로 절약(節約) 일서(一書)에 나아가 퇴계기의(退溪記疑) 우재차(尤齋箚)의 농암문목(農巖問目)을 편입하고 사이에 또 자기의 뜻을 보태어 글 뜻이 도리에 어긋날 것을 보충하여 이것으로써 일서(一書)를 만들어 이름하여 증보절약(增補節約) 통편주해(通編註解)라 하였다. 또 대학보주(大學補註:와 같은 책이 있으니, 참으로 주자서를 읽은 자의 지침이요, 또 가로되 성인의 가르침과 현인의 훈계가 해와 별같이 밝아 알기가 어렵지 아니하니, 힘써 행함이 요긴하고 입과 귀로 배운 것은 진취가 아니 된다 하였다. 세속선비가 많이 문목(問目) 장서(長書) 치빙(馳騁) 논변(論辨)으로 능사를 삼으나 선생은 매우 이 습성을 싫어하고 묵묵히 알고 몸소 실천하며, 거두어 싸고 머금어 기르기에 힘쓴 고로 사람이 혹 물외은일지사(物外捿逸之士)로 지목하고 그 학문의 참 연원과 학식의 깊이를 아는 자 드물었다. 본래 기질이 허약하고 오래 고질에 잠겨 소리가 입에 나온 것 같지 않고 몸이 옷을 이기지 못한 것 같아 만일 소리를 높혀 읽고, 외우면 두어편을 넘기지 못하고 혼비(昏憊)를 느낀고로 매양 소리를 낮추어 가늘게 읽으나, 몇날 못가서 반드시 병이 나고, 병이 위독해도 내 병은 내가 안다 하고, 마음을 화순이 하여 깊이 생각하면 일 이일 후에 정신이 맑아지고 기운이 회생하니 위중한 병이 아니면 일찍 자리에 눕지 아니한 지라 그 정력이 진실함을 가히 엿보겠도다. 중년에 미사여구(美辭麗句)의 문장에 힘썼으나, 가공(架空)한 저술은 아니하였고, 또 초고를 두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산고(散稿) 약간이 있을 뿐이다. 일찌기 가로되 五十이전에는 다만 궁이(窮理)에 책공하고 五十이후에 저술을 시작하여 평일 구도(求道)의 심상을 적이 폈으나 겨우 수년 뒤에 별세하여 미처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였다. 본디 천성이 겸허하여 아호가 없더니 정사(精舍)의 액호(額號)를 도계(道溪)라 함으로 사우(士友)간에 도계처사(道溪處士)라 칭도하였다. 아! 슬프다. 용겸(用謙)의 멸열천박(滅裂淺薄)한 식견으로써 어찌 선생의 도덕의 만(萬)에 一을 규칙(窺測)할 수 있으리요 마는 세의(世誼)의 중후(重厚)와 성망(聲望)의 유동(攸同)으로써 행장을 부탁하니, 이 천학이 여러번 사양하다가 얻지 못하고 힘써 찬술하여 오직 후세 군자의 침작천양(斟酌闡揚)을 바랄 따름이다. 안동(安東) 김용경(金用謙) 지음 음판서호효효재(蔭判書嘐嘐齋)
 
1. 문헌 목록 〉16. 16世 〉14. <부정공>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소암공휘언신묘갈명
1. 문헌 목록 〉16. 16世 〉16. <부정공>사제병사공휘호신문장조재동궁시(賜祭兵使公諱虎臣文莊祖在東宮時)